한참을 앞장 서 걸어가던 아오미네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갑자기 자리에 멈추는 바람에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등에 그대로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이를 어찌하지 싶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쿠로코를 향해 아오미네가 말했다.
“테츠.”
고저가 없는 그 목소리에 분노가 담겨 있지는 않은 듯 해 쿠로코는 내심 안심하며 대답했다.
“네, 주인님.”
“켁. 뭐가 주인님이냐, 주인님은. 그냥 아오미네라고 불러.”
쿠로코의 대답에 아오미네는 질색이라는 듯 말했다. 그의 말에 쿠로코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오늘 겪는 일은 모두 처음 겪는 일 투성이라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이던 쿠로코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오미네님.”
“…그 님자는 뺄 생각이 없는거냐…”
아오미네는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어 틀이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쿠로코와 눈을 마주치곤 말했다.
“아무튼, 테츠 너. 그 향 조절할 줄 모르냐?”
“향…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쿠로코의 모습에 아오미네는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향을 감추지 않고 있을 때부터 혹시나 했지만 그의 예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슬며시 자신의 향을 내뿜었다. 순식간에 선택 받은 이만 맡을 수 있는 그의 향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훅 들어오는 향에 정신이 아찔 해진 쿠로코는 그대로 쓰러질 뻔 했으나 간신히 버텨냈다. 벽에 기대어 힘들게 숨을 내뱉는 쿠로코를 보며 아오미네는 자신의 향을 살짝 누그러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수처럼 강하게 달려드는 아오미네의 향에 쿠로코는 정신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향, 맡을 수 있지 너. 너도 비슷한 향이 난다고.”
그 말에 쿠로코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아오미네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서 이렇게 강렬한 향이 나고 있다니. 쿠로코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점점 초점이 흐려지는 쿠로코의 눈을 본 아오미네는 황급히 자신의 향을 감추었다.
“나 참..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거냐.. 알파랑 오메가가 뭔지는 아냐, 너?”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그 끄덕거림을 본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는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이렇게 향을 풀풀 풍기면서, 러트 경험도 안 해본 건 아닐 거 아냐.”
“러트..요?”
쿠로코의 반응을 보아하니 러트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정말 귀찮은걸 떠 안게 되었군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설명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아오미네는 이내 결심을 한 듯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아오미네는 귀찮은게 딱 질색이었고, 구구절절 상냥하게 설명을 해줄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쿠로코가 러트가 뭔지 모른다 해서 그에게 끼치는 피해도 없었으니 어찌되던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단지 그의 코를 자극하는 쿠로코의 향이 거슬릴 뿐.
“으..진짜 아무것도 모르나보네. 뭐, 아무렴 어때. 일단 그 향부터 어떻게 좀 하자.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테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고 마음을 안정 시키는 거야. 너의 존재감을 네 안에 가두듯, 밖으로 아무것도 내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봐.”
아오미네에게 다가간 쿠로코는 그의 말대로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내쉬었다. 몇 번의 호흡이 반복되자 점차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철컥, 순간 쿠로코는 자신의 몸 안에서 새어나가던 무언가를 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잘하네, 테츠.”
점점 옅어지는 향에 아오미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쿠로코에게 다가가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처음 들어 보는 칭찬에 쿠로코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오미네는 그저 자신을 자극하던 향을 더 이상 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다시금 쿠로코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넓디 넓은 복도 안을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가득 메웠다.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감싸애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볼까 아오미네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어 입을 닫아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걸어가던 중, 아오미네의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왜?”
“전 무슨 일을 하면 되는 거죠?”
그 말에 아오미네는 흘긋 자신을 따라오는 쿠로코를 쳐다보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코를 보고 살짝 얼굴을 붉어진 아오미네는 곧바로 시선을 앞으로 돌려 버렸다. 아오미네는 이래저래 고민하며 시킬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게 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시종을 만든 탓일 것이다. 심심풀이 해줄 상대 정도로 해두면 되겠지라 생각하며 아오미네는 대답했다.
“넌 오늘부터 내 시종이다. 뭐.. 하는 일은.. 글쎄. 내가 심심할 때 상대 해주는 것 정도 이려나?”
그 말에 쿠로코는 ‘심심할 때 상대’라는 말을 홀로 조용히 되내이고 있었다. 화려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커다란 방문에 다다르자 아오미네는 걸음을 멈췄다.
“자, 여기가 내방. 넌 이 옆에 방에서 생활하면 돼.”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손목을 놓고 손가락으로 문의 옆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쿠로코는 그 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잡고 있던 손목을 다른 쪽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행동을 놓치지 않고 쿠로코의 손목에 눈길을 준 아오미네는 순간 기겁을 하며 쿠로코를 향해 외쳤다.
“으헉! 뭐야. 손목에 멍들었잖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깜짝 놀란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팔을 낚아채 손목을 자신의 눈 앞으로 가져왔다. 한참을 뚫어져라 쿠로코의 손목을 샅샅이 흩어 보던 아오미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서 있던 쿠로코는 고개를 푹 숙이곤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치만 전 한낱 노예일 뿐이고..”
주저하는 쿠로코의 말투에 아오미네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노예면 안 아프기라도 하냐!? 그리고 노예가 아니라 내 시종이라니까! 정말인지.. 따라와, 테츠.”
그게 그거 아닌가요란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쿠로코는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화가 난듯 한 아오미네의 모습에 쿠로코는 잔뜩 겁을 먹은 상태로 아오미네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 해왔다. 역시 벌을 주려나, 라는 생각을 하며 쿠로코는 두 눈을 꼭 감고 제발 덜 아픈 벌을 주길 빌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방 구석의 선반으로 직진해 무언가를 찾으려 선반을 뒤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원하는걸 찾았는지 아오미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오미네는 손에 하얀 무언가를 들고 쿠로코를 향해 다가왔다. 점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쿠로코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졌다.
“손목 이리 내봐, 테츠.”
자신의 예상과 다른 말에 쿠로코는 꼭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아오미네를 쳐다보았다. 뭘 하느냐고 묻는 듯한 그의 표정에 쿠로코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에게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쿠로코의 손목을 잡은 아오미네는 자신의 손에 들린 케이스의 뚜껑을 열어 무언가를 쿠로코의 손목에 바르곤 하얀 붕대로 그의 손목을 감쌌다.
“자, 이러면 됐겠지. 적당히 안 아파지면 알아서 풀어라, 테츠.”
쿠로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자신의 손목에 감싸진 붕대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손목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의 행동에 아오미네는 자기가 뭘 잘못 처치했나 싶어 내심 불안에 잠겨 있었다. 한참을 자신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요리 저리 뜯어보던 쿠로코는 아오미네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오미네님.”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 아오미네의 얼굴이 빨개졌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웃으니 아까 전과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아오미네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뭘 그런걸 가지고.. 멍들게 해서 미안하다, 테츠.”
차마 쿠로코를 계속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아오미네는 고개를 훽하니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유난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빛나 보였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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