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어느 때와 같이 경쾌하게 인사를 하며 집에 들어오던 사라다는 부엌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발걸음을 멈췄다. 사쿠라가 일을 가 집을 비운 사이 도둑이라도 든 것일까? 사라다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인기척이 느껴 진 쪽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무언가 찾고 있었는지 부엌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새까만 저 사람은 분명.. 

".....파파...?"

사라다는 제가 본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사라다가 알기로는 사스케는 장기 임무를 나간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집에 오다니? 뭐, 언제는 연락하고 찾아 왔냐 만은 적어도 사라다가 아는 사스케는 임무가 끝나기 전에 집에 돌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호카게님이 적어도 6개월은 걸릴 임무라고 하셨고, 사스케가 임무를 간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직 돌아올 때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사라다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스케가 왜 집에 와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스케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라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라다 왔구나."

"언제 집에 돌아오셨..아니 그것보다 뭐하고 계신 거예요?"

그랬다. 당장 중요한 것은 사스케가 왜 돌아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사스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였다. 무엇을 했기에 부엌이 이 난장판이 되었으며 곤란하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서 있었던 것일까. 사스케는 그 물음의 답을 해주고 싶지 않은 듯 눈을 돌렸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라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려고."

"네?"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사라다에게 닿지 못했는지 사라다는 사스케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생일 준비 하려고.."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스케가 귀 끝까지 빨개 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 내뱉은 대답은 매우 의외의 것이었다. 사스케의 말에 사라다는 오늘이 자신의 엄마의 생일임을 떠올렸다. 묘하게 느껴지는 동질감에 사라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실 사라다도 엄마의 생일을 준비하기 위해 빠르게 임무를 끝내고 급하게 집에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다는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다가 간신히 진정이 됐는지 웃음을 멈췄다. 사스케는 그 과정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요, 파파. 생일 준비하려고 하시는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 부엌이 어질러 진 거에요?"

"그게...도통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 말 뒤에 이어진 사스케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임무가 끝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쿠라의 생일은 챙겨 줘야 할 것 같았기에 임무 도중 집으로 돌아온 사스케는 사쿠라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해주자 라는 생각으로 부엌에 들어섰다. 하지만 오랜 기간 집을 비우는 사스케가 뭐가 어디 있을지 알 리가 만무했다. 소금이 어디 있는지, 식용유가 어디 있는지, 이렇게 하나하나 찾아가며 요리를 하다 보니 지금 집안 상황이 이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한 사라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사스케에게 재료는 자기가 찾아드릴테니 파파는 요리에 전념 하라는 말을 전했다. 사스케는 불안한 눈빛으로 사라다를 쳐다봤지만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사라다의 눈빛에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불 위에 올려 놓은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사스케가 말하는 재료를 사라다는 척척 찾아 사스케에게 건내주었다. 그리고 사스케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요리를 하고 있는 동안엔 사라다가 어질러진 부엌을 정리하였다.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봐 정말 완벽한 호흡을 맞추는 둘은 순조롭게 하나씩 요리를 해나갔다. 대략적인 정리를 끝낸 사라다는 식탁 위에 놓여진 이상한 보자기를 발견했다. 통이 싸여 있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그 통 안엔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건 뭐에요, 파파?"

"사쿠라가 좋아하는 가게의 매실 절임이다."

보지 않아도 사라다가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사스케는 후라이팬에서 익어 가고 있는 요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그 말에 사라다가 아무런 대꾸도 보이지 않자 사스케는 후라이팬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 말을 덧붙였다.

"예전에 같이 여행 갔을때, 그 집 매실절임이 정말 맛있다고 참 좋아하더군."

"헤에- 그렇구나. 그럼 이건 마마에게 주는 생일 선물인거예요?"

"뭐..그렇지."

"다른거는요?"

"다른거?"

사라다의 물음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되묻는 사스케를 사라다는 얼척이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그..뭔가 이런거 말고 좀 더 로맨틱하고! 멋진!! 뭐 그런거요!"

"흠.....뭔가가..더 필요한가..?"

분명 검은색인데도 새빨간 불처럼 이글거리는 사라다의 눈에 사스케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사쿠라 몰래 와서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사쿠라가 좋아하는 음식도 멀리서 생일 선물로 사 왔고, 맛있는 음식도 준비했다. 사스케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지 눈을 뜨곤 사라다에게 되물었다. 그 물음에 사라다는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았지만 어쩌랴. 자신의 아빠는 이런 로맨스는 1g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라다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쉬곤 사스케에게서 젓가락을 뺏어 들곤 그를 집 문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자자, 이제 요리도 거의 끝났으니 파파는 나가서 이노 아주머니네 가게에 가셔서 꽃이라도 사오세요! 식탁에 꽃병 놓고 거기 꽂을 거 하나랑 마마한테 줄 꽃다발 하나씩요!"

어느새 사스케를 문 밖까지 밀어낸 사라다는 재빠르게 자기 할말만 사스케에게 내뱉고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스케는 닫혀 버린 집 문을 황망히 쳐다보다 꽃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서오세.....사스케?"

꽃집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밝게 인사하던 이노는 의외의 손님에 말을 멈췄다. 눈 앞의 존재가 실제인지 환영인지 모르겠다는 이노의 표정에 사스케는 멋쩍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꽃을 좀 사려고 하는데."

둘 사이에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노는 대략적인 상황이 다 파악됐는지 굉장히 밝은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머, 웬일이야. 네가 이런데도 다 오고!! 아, 오늘 사쿠라 생일이었지. 그것 때문에 온거구나!"

박수까치 치면서 어머 웬일이니 라고 말하는 이노는 그 어느 때보다 들떠 보였다. 이노는 이리저리 꽃 사이를 왔다갔다하더니 아무말 없이 가만히 서있는 사스케에게 물었다.

"그러면 뭐, 혹시 따로 찾는 꽃 있어?"

".....꽃병에 꽂을 용도로 하나, 꽃다발로 하나 사려고 하는데..."

"흐응-그렇구나. 생각해 둔 꽃이 없으면 그냥 예쁘게 내가 골라서 만들면 될까?"

"그... 꽃병에 꽂을 꽃으로 벚꽃이 있을까?"

 "아- 그럼 있지! 이렇게 나뭇가지째로 다듬어서 꽃집에서 파는 게 따로 있어. 어때? 이걸로 할래?"

이노가 보여 준 것은 벚꽃이 피어 있는 자잘한 나뭇가지를 잘 다듬어 놓은 것들이었다. 봄의 정령들이 앉아 있는 듯 사랑스러운 꽃송이는 한 여인을 떠올리게 했다. 꽃가지를 유심히 살펴보던 사스케는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이노는 밝게 웃으며 그럼 이걸로 포장할께라고 말했다.

"그러면 꽃다발은 뭐로 할지도 정해놨어?"

"그건 아직..."

"흠...꽃다발 처음 주는거던가? 그럼 역시!! 여자한텐 이게 직빵이지!!"

이노가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사스케에게 내민것은 장미로 이루어진 꽃다발이었다. 가운데는 붉은 장미 송이들이 하트 모양으로 얽혀 있었고, 그 주위를 하얗고 앙증맞은 안개꽃이 감싸고 있었다. 사스케는 그것이 왜 가장 좋은 꽃다발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했으나 이노의 패기에 눌려 꽃다발을 건내 받았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저거 포장해서 나올께!"

사스케는 그렇게 말하며 안쪽으로 들어가 버리는 이노를 보다 손에 들린 장미다발로 눈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사쿠라에게 꽃을 사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전에 같이 여행을 갈 때 꽃을 꺾어준 적은 있지만말이다. 그렇게 흘러 흘러 생각하다보니, 여행하던 중 꽃을 꺾어서 사쿠라의 머리에 꽂아 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때 사쿠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어쩔줄 몰라하다 자신의 두손에 얼굴을 폭 하고 묻더니 고맙다고 너무 예쁘다고 말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렇게나 꽃을 좋아하던데 한번이라도 사다줄 껄 이라는 후회가 일었다. 이미 지나간 일, 앞으로는 더 자주 꽃을 사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사라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을 때 쯤 이노가 벚꽃 뭉치의 포장을 끝내고 나와 사스케에게 건내주었다.







"파파! 무슨 꽃으로 사오셨어요?"

사라다는 집에 도착한 사스케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스케의 옆으로 달려가 손에 들린 꽃을 확인 했다. 꽃병에 꽂기 좋게 포장된 벚꽃 뭉치와 붉은 장미로 이루어진 꽃다발. 생각보다 자기네 아빠는 로맨티스트 기질이 있는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사라다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마마가 정말 좋아할것 같아요. 예쁘네요, 그쵸?"

사스케는 사라다의 웃는 얼굴이 사쿠라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꽃을 꺾어다 주었던 때 지었던 사쿠라의 미소와 사라다의 미소는 상당히 흡사했다. 그에 사스케는 가슴 속에 몽글몽글한 따스함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따라 웃었다.

"식탁은 제가 다 차렸어요! 여기다 꽃만 꽂으면 돼요, 파파."

사라다는 사스케의 손을 잡아 식탁으로 이끌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사스케와 사라다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들이 보기 좋게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사라다의 눈빛에 사스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사라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단 칭찬을 했다. 그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살짝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사라다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사라다- 엄마 왔다."

때마침 문 쪽에서 들리는 기다리던 목소리에 사스케와 사라다는 문 쪽으로 뛰쳐나갔다.

"어..? 당신??"

예상외의 인물이 집 안쪽에서 등장하자 사쿠라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곤 사스케를 바라봤다. 초록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런 사쿠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스케와 사라다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곤 사쿠라를 향해 동시에 말했다.


"생신 축하드려요, 마마!" "생일 축하한다, 사쿠라."


그 말과 함께 사스케가 자신을 향해 내미는 붉은 꽃다발에 놀란 사쿠라는 두어 번 눈을 끔뻑였다. 사스케와 사라다를 여러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사쿠라는 이내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걸 깨달았는지 그들에게 다가가 둘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

사쿠라의 눈가에는 살짝 물기가 어려 있었다. 사스케는 그걸 눈치 챘는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사쿠라를 떼어 내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 줬다. 그런 사스케의 행동에 사쿠라는 멋쩍게 웃으며 너무 기쁘니까 눈물이 나네-라는 이야기를 했다. 사쿠라의 말에 사스케는 사쿠라의 이마를 꽁 치며 말했다.

"아직 울기엔 이르다. 준비한 게 남아 있으니."

"마마! 이쪽으로 오세요! 빨리요!!"

사스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다는 사쿠라의 손을 붙잡고 식탁쪽으로 이끌었다. 사쿠라는 영문도 모른채 사라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흰 식기에 놓여져 있는 먹음직스러운 여러 음식들과 가운데 놓인 꽃병에 꽂힌 벚꽃이 사쿠라를 맞이했다. 봄의 마법에라도 걸린걸까. 날이 거의 저물었는데도 햇빛을 받은 듯 반짝 반짝 빛나는 식탁 위가 사쿠라의 시선을 빼앗았다. 흘러 넘치는 감동에 사쿠라는 입을 막고 세상에!!하며 식탁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오른쪽으로 가서 한번 보고, 왼쪽으로 가서 한번 보고, 위에서 한번보고 옆에서 한번 보고를 반복하던 사쿠라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크게 외쳤다.

"어! 이 매실 절임!"

"오는 길에 있길래 사 왔다."

"에이, 거짓말. 임무 갔던 쪽이랑 정반대쪽 지역에서 파는 거잖아? 맛있다고 했던 거 기억 해줬구나. 사스케군, 고마워!!"

사스케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자신에게 안겨 오는 사쿠라에 그냥 입을 닫았다. 일부러 먼 곳까지 들려 사왔다는 게 들켜서 창피한지 사스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금술 좋은 부부의 포옹을 사라다는 흐뭇하게 쳐다보다 조르륵 달려와 사스케와 사쿠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폭 안겼다. 그런 사라다가 귀여운지 사쿠라는 머리를 쓰다듬다 못해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사라다도 열심히 아빠를 도와서 준비해 줬구나? 정말 고마워, 사라다. 둘 다 사랑해!!"

사라다와 사스케를 끌어안으며 외치는 사쿠라의 말에 사라다는 사쿠라처럼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요, 마마."

그런 두 모녀를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스케도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랑한다, 사쿠라."

그 말을 들으며 사쿠라는 오늘이 자신이 보낸 생일 중 최고의 생일로 기억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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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생일 축하해!!!!!!!!!!!!!

큽 생일날 올리려고 급하게 썼더니 날림이네요..급전개에 8ㅁ8 사실 퇴고도 못했습니다...퇴고하다가 생일 지나버릴것같아서ㅠㅠㅠㅠ 혹시 오타가 발견되면 말씀해주세요!!

사쿠라 생일 축하한다고 쓴 글인데 정작 사쿠라는 얼마 나오지도 않네요ㅋㅋㅋ

사라다랑 사스케 둘 다 사쿠라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을테니까요, 그 둘이 사쿠라의 생일 준비를 하는 것이 보고싶었습니다!! 시간 부족으로 인해 자세히 쓰지는 못했지만..


사쿠라!!!진짜 생일 축하해ㅠㅠㅠㅜㅠ흑흐흑ㅠㅠㅜ어느덧ㅜㅠㅠㅜㅜㅜㅠ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ㅠㅠㅜ유부녀가 되고ㅠㅠㅜㅠ귀여운 딸래미도 낳고ㅠㅠㅠㅠㅠㅠ평생 행복하렴 사쿠라짱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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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케는 모퉁이 너머로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분홍빛을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

또였다. 요 며칠 새에 사쿠라는 명백히 사스케를 피하고 있었다.


걸어가다 멀리서 사스케가 보이면 그대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사쿠라의 모습에 사스케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도 해보았지만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손만 꼼지락거리다 바쁜 일이 있다며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맨날 사쿠라가 자기 뒤를 졸졸 쫓아다니거나 자기를 발견하면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마냥 도도도 달려오는 모습만 봐 온 사스케에겐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더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자신을 피하는 사쿠라의 모습이라니!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이미 사스케의 마음은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오늘에야말로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한 사스케가 사쿠라가 일하는 병원에 찾아오게 된 것이다. 비록 동료와 대화하며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사쿠라는 사스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른 속도로 도망가 버려 말조차 걸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스케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미묘하게 축 쳐진 듯한 어깨가 사스케의 기분을 대신 표현해주고 있었다.



"어라, 사스케?"


사스케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나루토가 멀리서 팔을 높이 들고 휘휘 저으며 사스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스케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 사스케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나루토는 사스케가 왜 여기 있는지 고민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내 해답을 찾았는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사스케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입을 열었다.


"호옥시~"


일부러 말을 늘어뜨리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들어는보자라는 마음으로 사스케는 나루토를 쳐다봤다. 그러자 나루토는 손가락으로 사스케를 척하니 가리키며 병원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위기감이라도 느껴서 사쿠라 데리러 온 거냐!!? 이열~ 사스케! 많이 발전했다니깐!"


나루토는 자연스럽게 사스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우리 사스케가 이제 다 컸다는 둥 남자가 되었다는 둥의 소리들을 널브러뜨려 놓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사스케는 나루토의 말에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나빠지다 못해 주위에 검은 오오라를 발산하기 시작한 사스케는 가라앉은 기분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 떼, 천둥벌거숭이. 그리고 그런 기분 나쁜 말투는 집어치워."


사스케의 신경질적인 말투에 나루토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곤 실실 웃으며 사스케에게서 손을 뗐다. 그런 나루토를 노려보던 사스케는 방금 들었던 말에서 이상한 단어가 껴있었단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런데, 위기감이라니?"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사스케의 말에 나루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스케를 쳐다보았다.


" 에-? 몰랐냐니깐? 그러니까 며칠 전……."






진료실 앞에서 무슨 일이라도 났는지 의사, 환자, 간호사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진료실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관심의 중심에 서있는 것은 의사 가운을 입은 분홍색 머리의 여자와 환자복을 입은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환자복을 입은 남성은 분홍색 머리의 여성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붉은 장미와 흰 안개꽃이 멋들어지게 포장되어있는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다.


"저....사쿠라씨."


남자의 긴장된 목소리가 주위의 사람들도 긴장되게 만들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몇몇은 애가 타는 듯 꿀꺽 침을 삼켰다. 남자의 앞에 서있는 사쿠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투명한 녹빛 눈을 굴렸다.

"저와! 교제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뒤이어 터져 나온 남자의 폭탄 발언에 일순간 사람들이 소란에 휩싸였다. 사쿠라씨는 사스케씨와 사귀고 있는 거 아니냐는 물음과 사귀는 건 아니라던데? 라는 대답, 그러면 썸만 탄건가?와 같은 이야기들이 대다수였다. 그 소란 속에서 벙어리라도 된 듯 사쿠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슴처럼 커진 눈망울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사쿠라씨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습니다! 게다가 환자를 대하는 사려 깊은 모습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지만 진중하게 이어가는 말에 어느새 소란은 가라앉고 한 남자의 고백만이 병원을 가득 채워나갔다.


"사스케씨와는 연인 사이인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사쿠라씨가 오랜 시간 사스케씨를 좋아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사쿠라씨가 제게 반하도록 할 테니까요. 저와 사귀어주신다면! 사스케씨처럼 사쿠라씨를 혼자 내버려두진 않겠습니다! 외롭지 않게 항상 옆에 있어드리겠습니다! 꼭. 꼭!!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남자의 선언이 끝나자 주위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개중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 우리 의사쌤은 좀 행복해져야해"! 라며 공감을 표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듯 얼어있는 사쿠라를 보며 남자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사쿠라의 손에 꽃다발을 쥐어주며 말했다.


"대답은 나중에 해주셔도 됩니다. 아직 절 잘 모르실테니까요. 먼저 절 알아가는 것부터 할까요?"









"-그렇게 되어서 병원, 아니 마을 전체가 한번 뒤집어졌다니깐.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매일 사쿠라를 만나러 오고 야근할 때는 같이 기다려줬다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다니깐! 근데...진짜 몰랐던-"

"너도 쓸모가 있을 때가 있긴 하구나, 나루토. 나중에 보자."


상황을 설명하다 덩달아 흥분한 나루토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런 나루토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사스케는 이야기가 끝나자 나루토의 말을 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어느덧 하늘엔 어슴푸르한 어둠이 깔리고 병실의 불은 하나 둘 꺼져갔다. 병원 정문 앞의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한 사스케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네가, 사쿠라에게 고백했다는 사람인가."

"그러는 당신은 누구기에 초면부터 반말......."


눈앞의 사내는 척봐도 나뭇잎마을의 사람은 아니었다. 하긴, 나뭇잎의 사람이 목숨이 아까운줄 모르고 미쳤다고 사쿠라에게 접근할까 라고 생각하며 사스케는 입 꼬리 한쪽을 끌어올렸다. 말을 걸자 짜증난 듯한 목소리로 대꾸하던 사내는 사스케의 흉흉한 눈빛에 눌려 말끝을 흐렸다.


"...맞습니다만. 그쪽이 사스케씨인가요."


한 눈에 사스케를 알아본 듯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스케를 노려봤다. 사스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사쿠라에게서 떨어져. 사쿠라는 너따위에겐 전혀 관심이 없을 테니까."

"그건 사쿠라씨가 선택할 문제 아닌가요? 사스케씨인지 저인지 말이죠!"


사스케의 말에 발끈한 사내는 냅다 소리를 내질렀다. 그 덕에 사스케가 뿜어내는 오오라가 좀 더 흉흉해졌지만 이번엔 사내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 사스케를 똑바로 노려봤다.


"그럼 때마침 나오는 것 같은데 물어볼까?"


두 사람의 시선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한 여인을 향했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을 다른 호칭으로 동시에 불렀다.


"사쿠라."

"사쿠라씨."


막 일을 정리하고 나온 사쿠라는 상황이 정리되지 않는 듯 눈을 깜빡였다. 요 며칠 새 사내가 자신을 계속 기다렸으니 한명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한명은 왜 여기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왜 같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이러저런 생각에 잠겨 눈만 데구륵 굴리는 사쿠라를 현실로 끌어낸 것은 사내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느 쪽 인가요, 사쿠라씨!"

"네?"


무언가 설명이 빠진 듯 한 사내의 물음에 사쿠라는 당황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사쿠라는 이 둘과 함께 있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사내가 묻는 질문 또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이 어느 쪽이냐는 걸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사쿠라의 표정에 사스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차근차근 되물었다.


"이 자와, 나. 어느 쪽이 좋냐고 묻는 거다."


사스케로서는 드물게 또박 또박 설명해주었음에도 사쿠라는 그 질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순식간에 많은 상황이 몰아치니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눈앞에서 질투에 찬 얼굴로 어느 쪽이 좋냐고 물은 저 사람이 정말 사스케군이 맞는 걸까? 대답을 기다리는 두 사람을 앞에 둔 채 사쿠라는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사쿠라씨! 이런 사람보다는 제 쪽이-"


사내가 사쿠라에게 말을 거는 순간, 사스케는 사쿠라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내의 다급한 외침은 사스케의 행동에 의해 사쿠라에게 닿지 못하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온 사쿠라를 보며 사스케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벙찐 채 서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먹이를 차지한 맹수가 지을 것만 같은 미소였다. 입가엔 만족스러움이 흘러나왔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만큼은 살기에 가까운 적의를 띄고 있었기에 사내는 몸을 흠칫 떨었다.

사스케는 허리를 숙여 사쿠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사쿠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다 사쿠라의 몸을 좀 더 잡아당겨 끌어안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를 선택해, 사쿠라."


귓가에 느껴지는 뜨거운 입김과 함께 들어온 열기가 넘실대는 말에 사쿠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사쿠라, 좋아해. 불안했던 거라면 얼마든지 말해 줄테니까. 나를 선택해."


사스케의 말에 사쿠라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자신을 열렬히 쳐다보는 눈빛이 하얀 머릿속을 분홍빛으로 물들여가는 것만 같았다. 옆에서 계속 좋아한다고 속삭이는 사스케의 목소리에, 분홍빛을 넘어서 붉게 물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사쿠라는 아찔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사..사스케군. 일단 잠깐만 놔 주면.."

"싫다면?"


사스케가 단칼에 거절할 줄 몰랐던 사쿠라는 당황해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했다.


"그그...저쪽분께 해야되는 말이 있어서..."

"그냥 이대로 하지?"


사스케는 사쿠라를 안은 팔을 살짝 풀어 사쿠라가 사내를 볼 수 있도록 뒤를 돌게 한 후 사쿠라를 안았다. 사스케는 사쿠라에게 백허그를 한 채로 사쿠라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채로 살짝 고개를 들어 사내를 향해 적의를 담은 눈빛을 쏘아주는걸 잊지 않은채 말이다. 그런 사스케의 행동에 사쿠라는 살짝 뻣뻣이 몸을 굳혔다가 떨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사내를 향해 말했다. 


"저..죄송합니다. 보다시피.. 저는 역시 사스케군이 좋네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사쿠라를 보며 사내는 주먹을 주억거리다 이내 손을 툭 떨구며 말했다.

"사쿠라씨가 행복하다면...어쩔 수 없죠."

약간 물기가 어린 목소리에 사쿠라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내는 사쿠라를 안고있는 사스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스케씨. 사쿠라씨를..행복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너무 외롭게 만들진 말아주세요. 그럼 전 이만.."

사쿠라는 힘없이 멀어지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런 사쿠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사쿠라를 안는 사스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사스케의 행동에 사쿠라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스케를 쳐다봤다.


"사스케군, 아까..그거.. 진짜야?"

"내가 그런걸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나?"

"그건 아니지만..사스케군에게 그런 말을 듣는건 처음이라서.."


사쿠라의 얼굴은 붉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분명 지금 얼굴은 엄청 꼴사나울꺼라고 생각하며 사쿠라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사쿠라의 마음을 알았는지 사스케는 사쿠라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고 그녀의 머리에 턱을 갖다대며 사쿠라를 완전히 품에 가뒀다. 

두근두근, 머리까지 울려 퍼지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에 사쿠라는 이 소리가 사스케에게까지 들리면 어떻게 하지라며 고민했다. 사스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줄은 꿈에도 모른채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사쿠라를 안고 있던 사스케는 뭔가 생각 난듯 입을 열었다.


"사쿠라. 요 며칠사이에 왜 날 피해 다닌거지?"

그 말에 사쿠라의 몸이 한번 크게 요동쳤다.

"그..눈치 챘었어?"

"눈치 못 채는 쪽이 바보라고 생각한다만."

"그건.."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사쿠라를 사스케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사쿠라는 말할 용기가 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아까 그 사람이 고백한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데... 사스케군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여서... 그냥 그.. 음.. 사스케군은 내가 누구에게 고백 받아도 신경쓰이지 않는구나 싶어서 조금 슬퍼져서.."

점점 작아지는 사쿠라의 목소리에 사스케는 힘주어 사쿠라를 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말해두자면, 난 네가 고백 받았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에? 정말로?"

"그래.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더군..."

그렇게 말하며 사스케는 나중에 자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동료들에게 꼭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사스케의 말에 사쿠라의 기분이 나아졌는지 사쿠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말이지.."

사스케는 부끄러워서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지만, 지금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고백 받았다는데 신경 쓰이지 않을리가 없지 않나. 지금도, 이렇게 달려왔는데."

그 말에 사쿠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쿠라는 사스케의 팔을 살짝 들어 뗀 다음 몸을 사스케쪽으로 돌려 사스케를 안았다.


"고마워, 사스케군. 정말로 좋아해!"

그런 사쿠라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스케는 옅게 웃으며 사쿠라를 끌어안았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

그 말을 끝으로 살짝 들려진 사쿠라의 뒤꿈치와 살짝 숙여진 사스케의 고개.


두 사람은 오늘부터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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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딸려서 좀 급전개입니다...ㅋㅋㅋㅋㅋ

그 사스케의 나를 선택해 라는 대사!! 후르츠 바스켓에서 토오루 아빠가 엄마한테 고백할때 사용하는건데 너무 멋있어서 차용해왔어요ㅋㅋㅋㅋ 질투하는 사스케가 보고싶었습니다

뭔가 이케 귀여운 사스사쿠는 첨 써보는것같네요ㅋㅋㅋ



*가능하시면 BGM 재생하고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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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안정되었고, 세계는 평화로워졌다.

제로는 원래 혼란한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들의 정식적 지주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불합리함에 맞서 싸우는 존재. 그 존재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고, 많은 사람들이 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이제 세상은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아직 많은 범죄들이 존재했지만, 그 정도는 제로가 나서지 않아도 경찰이나 시민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제로가 나서야 할 정도로 큰일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큰 힘을 갖고 있는 제로의 존재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뿐이었다. 언젠가 제로가 변해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줄 뿐이었다.

이제 이 세상에 제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완전한 평화를 위해, 제로는 사라져야만 했다.



한 때 제로와 맞서 싸웠지만 이제는 제로라 불리는 사내는 어두컴컴한 방안에 홀로 앉아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친한 친우를 잃고 자신마저 잃고 살아왔다. 

소중한 사람이 원한 모두가 행복한 세계를 보고 싶어서, 친한 친구가 맡긴 세계를 포기할 수 없어서 자신을 희생시켜왔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 이 불행한 연극도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유피."

스자쿠는 자신이 끝끝내 지키지 못했던 소중한 이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이름이지만 입 밖으로 내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게 이렇게 낯설 줄이야. 이런 상황이 너무나 슬퍼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가 부여받은 기사의 임무는 황녀의 보호. 그러나 그는 그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의 나라의 오랜 전통에 의하면 주인을 지키지 못한 사무라이는 할복을 함으로써 속죄를 한다고 한다.  스자쿠는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 해왔던 검을 양손으로 잡고 칼날이 자신을 향하도록 높이 치켜들었다. 이미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녀를 지키지 못한 속죄를 해볼까한다.

날카로운 속죄가 그의 배를 관통했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천국에 갔을 테지만 난 지옥으로 떨어질 테니까. 그치만, 그렇지만,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스자쿠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이내 그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한순간 사라졌던 모든 감각들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스자쿠는 눈을 떴다. 아까까지 느껴지던 배를 찌르는 듯 한 고통도, 뜨뜻미지근한 피의 감촉도 모두 사라진 채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져있는 회색의 공간을 바라보며 스자쿠는 자신의 죽음을 실감했다. 모든 색채를 물에 씻어낸 듯 한 그 공간은 너무나 고요했다.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사람도, 어떤 물체도 그 무엇도 없었다.


그런가, 역시 죽어서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건가.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피식 웃곤 고개를 떨궜다. 죽기 전에도, 심지어 죽어서까지도 그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항상 머리 한구석에선 그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그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리라. 그 사실이 그를 허망하게 만들었다. 스자쿠는 망부석이 된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 소년 앞의 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스자쿠."

앞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너무나 만나고 싶었던 분홍빛 머리의 소녀가 서있었다.

"고생 많았어요. 수고했어요. 힘들어도, 외로워도 버텨줘서 고마워요. 모든 걸 떠안게 해서 미안해요."

변함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읊는 다정한 말들이 스자쿠를 감싸 안았다. 여전히 그녀는 그에게 과분할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었다. 차오르는 눈물이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을  자꾸 흐리게 만들었다.

스자쿠는 손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계속 쏟아지려는 눈물을 멈추려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눈물샘은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하염없이 물방울들을 흘려보냈다. 한참 눈가를 비비던 스자쿠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흐느꼈다.


"유..피..난....나는.."

"이제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울음에 가로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스자쿠를 바라보던 소녀는 소년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한걸음 다가온 그녀는 스자쿠의 머리 위에 살포시 양손을 얹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머리 위에 얹어진 무게감이 그녀의 기사로 임명받던 날을 떠올리게 해 스자쿠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끊임없는 악몽 속에서 그를 꺼내주었다. 괜찮다는 한마디의 말이 스자쿠가 지금까지 떨쳐내지 못한 짐들을 모두 내려놓게 만들었다.


"사실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 모습에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화가 난 듯 단호해지는 목소리에 스자쿠는 살짝 몸을 경직시켰으나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곧 몸의 긴장을 풀었다.


"어쩔 수 없죠. 스자쿠는 상냥하니까. 뭐라 하지 않을게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등까지 쓸어내려왔다. 메말라 비틀어져가던 그의 마음에 행복이 차올랐다. 눈에선 계속 눈물이 흐르는데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서렸다. 스자쿠는 이 일들이 모두 꿈속의 일 같아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그런 스자쿠의 행동을 본 소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뭐라 말을 하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는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닌 것 같네요, 그쵸?"

스자쿠의 머리에서 손을 뗀 소녀는 밝게 웃었다. 그러곤 지금까지 내뱉은 말들 중 가장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나랑 같이 가요. 스자쿠."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쳐다보던 스자쿠는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새하얀 손, 가느다란 손목, 가냘픈 어깨와 그 위에 흐트러져 있는 분홍빛 머리카락.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유페미아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전히 티 없이 맑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없이 투명한 눈동자 옆에는 작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스자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눈치 챘는지 유페미아는 한쪽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해맑게 웃었다. 황녀라는 것을 모르고 처음 만났던 그때와 똑같은 미소였다.


그 미소에 홀린 듯 유페미아를 바라보던 스자쿠는 이내 유피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둘 주위에 무수히 많은 꽃들이 피어났다. 무채색뿐이었던 공간을 색색의 꽃들이 수놓아갔다. 그와 함께 많은 것들이 빠르게 여러 색채로 덧칠해졌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 쬐고,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시작했다. 싱그러운 푸른빛들이 피어나며, 향긋한 녹음이 나기 시작했다. 물감에 물을 한껏 섞어 칠하듯, 하늘에 푸른빛이 번져나갔다. 소녀의 분홍빛 머리와 같이 소녀의 뺨이 발그스레 물들어나갔다. 

잿빛에 익숙해졌던 눈에 한순간 많은 색들이 흘러 들어와 눈이 핑글핑글 도는 듯 했다.

가슴 속에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감정들을 터뜨리듯 세상이 환하게 변해갔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구원, 그 자체였다.


스자쿠는 유페미아의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끌어안는 힘이 너무 강해 소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붙잡아오는 손짓이 너무 간절해 아무런 말없이 그를 똑같이 안아주었다.

"유피.. 유피..."

"네? 왜 그래요, 스자쿠?"


스자쿠는 유페미아의 어깨를 붙잡고 자세를 낮춰 그녀와 시선을 맞추곤 옅게 웃으며 말했다.

"보고..싶었어요, 유피."

스자쿠는 너무 오랜만에 짓는 미소라 이상해 보이진 않을지 걱정했다. 그의 걱정과 달리 붉게 부어오른 눈가에 떠오른 미소는 소녀의 시선을 뺐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멍하니 스자쿠를 쳐다보던 유페미아는 곧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얼굴과 똑같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도. 저도 보고 싶었어요, 스자쿠."

유페미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자쿠는 소녀의 사랑스런 복숭앗빛 입술에 입을 맞췄다.


머나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둘을 축복하듯 여러 파스텔 톤의 색종이를 잘라 흩뿌리는 것 같은 꽃바람이 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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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렴 스자유피ㅠㅠㅠㅠㅠㅠㅠㅠ 제 최애컵입니다 너무 예쁜아이들입니다 흑흐흐흐규ㅠㅠㅠㅠㅠ


제 맘속에서 스자쿠는 분명 ㅈㅅ할꺼라 생각해서... 누구에게 당할만한 실력을 가진 아이는 아니니 분명 그럴것 같았....기어스가 걸려있긴 하지만 를루슈가 없으니 이제 효력이 없지 않을까요..? 사실 본지 너무 오래되서 정확한 설정이 기억이 안나는..

그 중간에 사무라이가 할복한다는 그건 그냥 제가 쓰고싶어서 끼워맞춘겁니다. 사실무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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